묵상나눔
어제 금요기도회는 에필로그찬양단의 찬양과 간증의 시간으로 이뤄졌다. 목사님부부와 음악감독님 등 시각장애인 3인조 찬양단이었지만, 그들이 준 감동의 크기는 수십, 수백 명의 찬양단보다 더 컸을 것이라 여겨진다.
간증 시간에는 목사님의 아내분께서 시각장애인부부로서 사랑의 산물인 아이를 가지는 데 있어 고난과 더불어 축복에 대한 내용으로 간증을 하셨다.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은혜로운 감사의 시간이었다. 나 역시 눈물이 나왔다.
특히,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장애에 대해 하나님의 실수가 아닌가 하고 여겼다가 사회적 편견 등 수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견뎌내고 힘들게 첫 아이를 얻었을 때의 기쁨을 얘기하며 하나님께서는 결코 실수하시지 않는다고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신뢰를 표하였다.
에필로그의 찬양모습과 간증을 접하며, 난 한없이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였다.
지난 한 주 내내, 묵상나눔에서 하나님의 위대함에 대비된 ‘좀스러움’을 표현한 죄스러운 고통과 함께 레위기와 민수기를 읽으면서 성경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는 나 자신이 몹시도 싫었다.
아, 그런데….
간증을 듣는 내내 간증에서 다 표현 못 한 행간의 의미를 되새겨 보니, 시각장애인들이 겪는 고통에 비하면 난 그저 철없는 응석받이보다 못한 존재였다는 사실이었다.
오늘 새벽기도회 누가복음 21장 29-38절에서 하나님의 임재 관련 내용이 있었다.
‘나무를 보라 싹이 나면...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’
요즘 눈길 가는 곳마다 온갖 꽃들이 피어나고, 겨우내 앙상하였던 나뭇가지엔 어느새 물이 오르고 연초록 새잎이 돋아나고 있다. 바야흐로 ‘때’?
시각장애 목사님 부부가 온갖 고난을 이겨내고 얻은 소중한 첫 아이의 이름이 ‘하임’이라고 하였다. ‘하나님의 임재’를 담았다 하였다. 아, 허를 찔린 이 느낌은 뭔가.
에필로그는 장애인으로 구성된 3인조 찬양팀이다. 그렇지만, 비장애인 수십, 수백보다 더한 감동을 주는 대단한 찬양단이다. 그들을 통해 지극히 비장애인이라고 생각하는 나 자신이 오히려 장애인임을 느낀다. 이런 깨달음을 주신 하나님, 그리고 에필로그에 감사를 드린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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